4월시작부터 벤쿠버는 슬슬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듯 엄청나게 강렬한 햇볕이 하루하루 강해지는게 느껴지는 4월 중순,
그 강렬한 햇볕을 느낄 여유도 없이 나는 코로나로 집에만 갇혀있는 중이었다.
잠깐 잠깐 산책겸 혼자 집근처 공원들을 거닐고는 하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핀 꽃들을 보면
‘코로나로 난리여도 봄은오는구나’싶다.
‘잔인한 4월’ 이라는 말을 10대 시절부터 좋아했는데, 진짜 이건 레알로다가 잔인한 4월 이었다.
2020년, 단 몇시간 앞을 알 수 없던 숨막히는 3월 말 코로나 사태.
내가 벤쿠버에 올 때 한국의 모두가 ‘코로나청정지역에 간다’고 부러워 했고,
나역시 ‘코로나는 아시아 얘기지 여기는 괜찮아’ 라고만 생각했는데.
더 난리 바가지 부르스인 북미에서 코로나사태를 몸소 체엄하며 ‘참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른다’는걸 다시 한번 느꼈다.
전염병관련 박사나 WHO 직원정도나 전 세계가 이 지경이 될 거라는걸 알았을까.
내가 캐나다에 이런상황이 벌어질거라는걸 얼마나 상상 하지 못했으면 나는 한국에서 마스크도 딱 세장 들고 왔다.
뒤늦게 직격탄을 받아서 아예 나라전체가 정지된 캐나다는 처음엔 나처럼 모두가 혼란스럽고 불안해하는가 싶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가 조금씩 이 상황에 적응해 가는 것 처럼 보였다.
4월 중순의 벤쿠버는 한명두명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나 동양인 비하도 많이 줄어들었다.
(우선 내가 마트에 갈 때 마스크쓴 동양인 여자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이 없어짐)
사회적 거리두기도 점차 적응해나갔다. 인류발생 이래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일들을 나 역시 경험하고 겪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내가 조금 성장한 느낌이었다.
내 생에 최고의 환장대잔치로 기억남을 2020년, 오늘은 유학생으로서 경험하고 배운 ‘벤쿠버 의료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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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어떻게 감염이 되었고 문제가 생긴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3일 연속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치킨에 맥주왕창 먹고 코로나 욕하면서 ‘렌즈 안빼고 그냥 자던 그때’부터 가 아니었나 싶다. 왼쪽눈이 조금 뻑뻑하고 아프더니 점점 더 충혈이 심해져 갔다.
처음엔 괜찮아지겠지, 제발 괜찮아져라 렌즈 안끼면 되겠지 싶었는데 3일을 기다려도 호전되지 않던 내 왼쪽눈은 결국 ‘병원에 반드시 가야하는 지경’ 까지 와버렸다.
4일째 되던날 밤은 왼쪽 눈알은 물론이고 얼굴 뼈 속까지 누군가 칼로 쑤시는 것 같이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눈에 문제가 생기고 하루 이틀째 되던 날 드럭 스토어에 가서 충혈된 눈 케어하는 인공눈물을 사서 넣어봤지만,
당연히 소용이 없다. 나는 이미 알고있었다. ‘병원에 가야 하는 지경’ 이라는 것을.
밤새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한국이면 그냥 지금 당장 응급실 가면 되는데,
한국이면 조금만 이상했어도 병원 갔을텐데’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코로나 시국’에 이곳 캐나다에서 응급실을 간다는것도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었고,
‘너 응급실 그냥 들어가기만해도 한 1000불 낼걸?’ 이라는 주변 지인의 말을 듣고 당장 응급실에 달려가는걸 참기도 했다.
‘눈 사태가 심상치 않아 와 진짜 이건 큰일이다’ 싶어 금요일 오전. 병원을 가기로 했다.
지인을 통해 코퀴틀럼한인타운에 한국사람들이 많이 가는 한국 의료원이 있다고 하여 진료예약을 위해 전화를 했는데.
‘코로나사태로 병원이 진료를 안한댄다. 초진환자는 방법이 아예 없고. 기존에 있던 환자도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정도만
처방하고 아예 진료를 하지 않는다’ 고 했다. 전화를 끊고 소리를 질렀다. “THANKS CORONA!!!" ^^
‘그래 이렇게 현지 병원 경험하는거지 ! 다양한 상황에서 실전 회화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 하면서
집앞 메디컬 센터에 갔는데 문이 닫혀있다. “뭐여... 코로나 때문에 병원 문 다 닫은거야 ?! 아니 아픈사람은 어떻게해 !” 하고
폭풍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코로나 때문에 병원이 문을 닫은건 아니고 ‘부활절’ 때문에 쉰다고 했다.
“부활절? 교회에서 삶은 계란먹는 그 부활절? 캐나다 국교가 기독교였나? 석가탄신일 같은 건가?” 싶어서
언제인제 날짜를 확인해봤는데 월요일이다. 다음주 월요일이 부활절인데. 그 전주 금요일부터. 금. 토. 일. 월 .을 쉬는 것이다.
미친줄 알았다. “아니 지네가 부활했어? 아니 무슨 부활절이라고 4일을 놀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야!!! 나는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날도 일하고 1월 1일 신정때도 일하고 !!어!!
추석에도 일하고 설날에도 일하고 빨간날 한글날 개천절 석가탄신일 광복절 다일했는데 !!!!!
니네는 부활절이라고 4일을 놀아!?!?!!니네가부활했어!?!?!!!“
거진 울상이 된 나는 한국에서 사온 진통소염제를 꼬박꼬박 시간 맞춰 먹으면서 금 토 일 월 고통을 견뎌냈다.
드디어 화요일이 왔고 메디컬 클리닉에 갔는데, 의사를 만날 수 가 없단다.
코.로.나.때.문.에. 그래서 그럼 나 진료 어떻게 봐야하냐고 물어보니 직원이 문자메시지를 보내 링크를 하나 가르쳐 준다.
직원 왈 “오후 2시 넘어서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의사가 너를 화상으로 진료할거야.” 란다. 뭐라고 ? 화상으로 진료를 보겠다고? “THANKS CORONA^^" 어쨌든 진료를 봐야 하기는 하니까... 2시 예약이었으나 2시 45분이나 돼서야
핸드폰 카메라로 연결된 메디컬센터 닥터와의 대화는, 가운도 아닌 티셔츠에 맨얼굴인 닥터의 wifi가 불안정한지 몇 번이나 끊겼다가 다시 연결되기를 반복했고,
나는 의사와 영상통화 총 3분하는데 175불을 냈다. 그리고 이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나를 다운타운내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보내주는 것.
캐나다는 ‘전문의’ 보기가 참 힘들다고 한다. 한국에서 내가 눈이 아프면 가까운 ‘안과의원’에 가면된다.
큰 병이라면? 종합병원 ‘안과’ 외래 예약을 하면 된다. 그러면 ‘안과전문의’가 진료를 해준다.
진료를받고 특별한 검사를 받지 않는 이상 2만원 이하의 금액을 결제한다.
처방전을 가지고 같은 건물 1층 약국에 가면 5천원 내외로 안약을 구입할 수 있다.
한시간이면 다 될 일을. 벤쿠버는 참 복잡하게 한다. 홈닥터나,지역 메디컬센터 의사가 먼저 나를 보고 소견서를 쓰고,
홈닥터가 직접 다음 병원을 예약해줘야 내가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3분카레 175불 메디컬 닥터’가 나에게 해준말은 “오! 너 응급실가야되겠다! 심상치가 않네~
빨리 세인트 폴 병원 응급실가. 지금가. 너 지금가야돼 내가 예약해줄게 bye~!” 이게 끝이었다.
짜증이 났지만 우선 응급실에 갔다. 손 소독을 수번이나 하고 응급실 창구에 앉아서 홈닥터가 써준 소견서와,
여권과, 집주소 등등 신상정보를 적고 난후 내가 병원 직원으로부터 들은 말은
“너 오늘 진료 보면 1040불 정도 나올건데 학생비자 가지고 오면 할인되서 856불이야.
돈 꼭 오늘 안가져오고 다음에 가져와도 돼” 였다.
‘그래...난 여기 외국인이고 의료보험 가입도 안되어 있는데 응급실 1040불...
그래 좀 심하긴 한데 예상했으니까 알겠어’ 했다. 의사를 너무나 오래 기다렸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잘 뻔한 무렵 끝에 만난 의사는 내 왼쪽눈에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신나게 진료를 하고, 즐거운 대화도 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돌아오더니 ‘내.일.오.전.벤.쿠.버.제.너.럴.병.원.에 있는 눈.전.문.병.원’ 에 예약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기가막혔다. 아니 지금 .... 나는 안과의사가 나를 20분이나 넘게 진료 한 거고.
내 눈에 염증생긴거 누가봐도 알겠구만 그냥 안약을 처방해주면 되는데!!!!
진짜 진지하게 물어봤다. 나 왜 약처방안해주냐고, 그랬더니 친절하고 한없이 상냥한 의사 왈
“아직 넌 안약 사용법도 모르고~ 안약 사용하는 설명을 들어야 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어~
내가 병원 예약 해 줄 테니까~내일 오전에 눈 전문 병원으로 가~ bye!”
다음날 아침 온라인클래스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VGH (Vancouver General Hospital)‘를 갔다.
혼자 버스를 타고 처음가보는 Fairview지역에 있는 큰 병원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병원 밖 출입구에
거리를 두고 줄을 서서 마스크를 쓴 의료진과 아주 멀리서 소리를 치며 진료를 접수하고 있었다.
나는 오전 10시 예약이라고 했더니 10시 45분이나 되 야 진료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 의사한번 만나는게 이렇게 힘든일 이었던가...’ 근처 팀홀튼에서 라떼를 사서 마시면서 나는 너무나 지쳐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병원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나는 접수처의 간호사에게 나의 이름과
‘St pauls hospital 응급실에서 보내서 왔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이것저것 보험에 대해 묻는다.
그래서 나는 ELS학생이고 현지 보험이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진료비가 805불’이라고 했다.
의사를 만나기 전 결제를 805불 결제를 해야하는데 결제를 뭘로 할거냐고 묻길래 체크카드로 하겠다고 했다.
간호사는 나에게 말했다. ‘현금이나 신용카드만 가능’ 이라고.
..............‘요즘 세상에 누가 805불 현금을 들고다닐것이며 ..... 체크가드결제가 안된다는게 말이되나’ 싶었지만
우선 꾹 참고 그러면 결제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했더니, 다른 병동의 카드 단말기에 가서 결제를 하고 와야 한단다.
심지어 그 불친절한 간호사는 그 다른 병동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나는 20분 넘게 헤매고 길을 묻고 또 묻고 물어 결제를 하러 갔다.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한국에서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렸던 모든 것과
의료인 부모님을 둔 자녀로서 받았던 혜택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가까스로 805불을 결제하고 또 다시 한참을 걸어 진료를 받으러 가는 그때 너무 서러워서 병원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진짜 서른세살 먹고 그렇게 서럽게 우는거 처음이거니와 내 생에 꼽을 서러움이었다.
“흐어엉엉어엉ㅇ 헝헝헝 허허허허헝 허흐흐흐흐흐흐 허어어어어엉ㅇ엉엉엉” 누가 보던지 말던지 그냥 엉엉 울었다.
한 20초 우니까 좀 창피한것같아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룸메이트로 알게 된 오빠한테 전화해서 나 아픈데 서럽다고 미친 듯이 울고 좀 진정이 된 후에는 들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한 후 씩씩하게 진료를 받으러 갔다.
나 너무 힘들다며 집잃은 고양이 표정을 하고 의사에게 온갖 하소연을 다 했다.
의사는 805불이 너무 과한걸 알지만 여기 정책이라 어쩔 수 없으니 자기가 해줄 수 있는걸 다 해주겠다고 했다.
"일주일 경과 보고 너 꼭 다시 진료받으러 와야하는데 그때 다른 닥터한테 무료로 진료 봐달라고 할게 꼭 진료 받아야해”
그리고 나는 두 개의 작은 안약을 처방받았고, 손가락 두 마디만한 안약두개는 60불을 훌쩍 넘어갔다.
눈부신 4월, 눈에 넣은 동공확장 안약 덕분에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 조차 없는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와 혹시나 내가 놓친 표현들이나 정보가 있을까 해서 응급실부터 VGH 안과 진료까지 모든 진료 내용을
녹음해둔걸 들으면서 다음주 병원 예약시간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그리고 5월 첫째주를 보내고 있는 나는 아직도 고생중이다.
그렇게. 한국이 너무나 그리운 순간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