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에 앞서 지금 교환학생으로 참가하기를 망설이는 친구들이 마음의 결정을 하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2012년 1월! 설레는 마음과 두려움으로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에서 미국 교환학생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나의 경우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에 시험도 보고 호스트 가족도
결정되었지만, 막상 그때가 되니 굉장히 망설여졌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한국 고등학생으로서 1년을 휴학한다는 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결국 미국행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이 나이가 아니면
다시 해볼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지나버리면 내가 언제 미국 고등학교 생활을 해볼 수 있을까?
만약 교환학생 프로그램 참가에 작은 갈등과 고민을 가진 학생들이라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서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이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을 가졌다면 더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곳에서 사교성이 좋아
많은 친구를 사귀고 대화도 많이 해서 영어도 늘면 물론 좋겠지만 여기서 배우는 것은
그런 것들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건 매우 일부분일 뿐이다. 몇 달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든 적응해가고 어려운 일도 능숙하게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중한 인연의 시작
유학원과 이미 교환학생 경험이 있는 선배로부터 얻은 조언과 정보를 통해서 가방을 준비하고
한국전통 민예품과 부채, 책갈피, 열쇠고리 등 호스트 가족과 새로 사귈 친구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들도 준비했다.
한국 공부에 손을 아예 떼고 있는 건 불안한 일이기에 틈틈이 공부할 수학참고서와 과학참고서도 조금 챙겼다.
호스트집에 피아노가 있다고 해서 악보도 챙겼다. 특히 악보를 가져간 건 잘한 일이었다.
호스트 가족은 물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연주해주면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드디어 미국으로 떠나는 날, 나와 우리 가족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우린 가볍게 포옹 정도만 하고 아무렇지 않게 떠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1년이 짧지만 긴 시간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내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덤덤한 척하셨던 것 같다.
어렸을 때 가족들과 미국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어서인지 낯설지는 않았지만 혼자 떠나는 긴 여정과
중간 기착지에서 짐을 찾아서 또 보낼 때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긴장감을 주었다.
20시간 정도 되는 긴 비행 끝에 샌 안토니오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드디어 호스트 가족과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룸메이트는 그날 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브라질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는데
어쩐지 친근한 표정은 아니어서 앞으로가 약간 걱정되었다.
샌 안토니오 공항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호스트 집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개가 6마리, 고양이가 2마리나 있었고 주위 집들은 목장이어서 소와 말들을 키웠다.
그때부터 ‘아! 정말 내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 걱정되었다.
하루 전만 해도 편안한 집에서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고 있던 내가 처음 보는 미국인들과 1년 가량의 시간을
허허벌판에 둘러싸인 시골 작은 집에서 지내야 한다니 앞이 캄캄했다.
그 집에는 호스트 부모님, 다른 교환학생 한 명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4명이었다.
그 친구와 친해지려고 가져온 선물도 주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보았지만
가까워질 수 없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2주 만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친구가 떠나고 나니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적적하기도 했다.
영어 대화를 더 많이 나누고 싶은데 가족들이 없으니 호스트집 선정에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숙제에 집중할 수 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조용히 세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잘 지낼 수 있어야 모든 생활이 편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미국사람들은 의사 표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싫어도 좋다, 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미국에서는‘싫으면 싫다, 맛이 없으면 없다’라고 자신의 기분과 의사를 확실히 표현해 주는 것이 예의이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럽지만, 나중엔 적응하게 된다.
8월엔 독일 출신의 새로운 룸메이트가 왔고 호스트 언니 두 명과 그 아들, 딸까지 들어와 같이 살았다.
브라질에서 온 룸메이트가 떠나고 나서 나와 호스트 부모님까지 3명이 6개월을 살았는데
갑자기 식구가 8명으로 늘고 나니 조금 불편한 점도 있었다.
다행히 룸메이트와는 성격이 잘 맞아서 서로 대화도 많이 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만남을 유지할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다행히 그 시기를 별 탈 없이 보낼 수 있었고
덕분에 시간도 의외로 빨리 지나갔다.
영어보다 중요한 건 적극성
도착한 다음 날, 내가 다닐 East Central High School에서 수강신청을 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이과 수업을 받아야 하므로 과학이나 수학 위주로 신청을 하고 평소 음악을 좋아해 합창반도 들었다.
미국 학교생활을 하기에 앞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친구를 사귀는 일일 것이다.
영어가 한국말 하듯이 능숙한 것도 아니어서 학교 가는 첫날 매우 떨렸다.
점심시간에는 ‘누구랑 먹지? 교실은 어떻게 찾아가지? 내 소개는 어떻게 하지? ‘등 많은 걱정을 안고 등교했다.
스쿨버스가 있는데 우리 집이 두 번째로 일찍 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침 6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7시쯤 학교에 도착했다. 첫날은 내게 정말 문화충격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날이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은 무척 적극적이었고 선생님을 친구처럼 대했다. 문을 잡아주고 lady first 등
매너도 정말 좋았다. 수업시간에 껌을 씹어도 되고 쉬는 시간엔 복도에서 커플들이 손을 잡고 다니기도 했다.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은근 흥미롭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학생 수가 3000명이 넘는 매우 큰 학교였는데 그중에 교환학생으로 온 아시아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한국인은 물론 나 하나였고 필리핀, 타이완, 중국 교포들을 합쳐도 전교에 10명이 넘지 않았다.
삼성에서 나온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현대, 기아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심지어 한국이 일본 안에 있냐고 질문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KOREA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간외교관이다.
한두 명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만 알려줘도 관심을 보이고 자기 친구들에게 날 한국에서 온 친구라고
소개해주고 그렇게 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된다. 점심시간은 A,B,C 세 가지였는데 처음에는 브라질 룸메이트와
먹다가 그 친구가 떠나고 나서는 다른 알게 된 친구들과 먹었다.
만약 첫날 같이 먹을 친구를 못 찾더라도, 친근해 보이는 친구들에게 가서 같이 먹어도 되냐고 물으면
굉장히 흔쾌히 받아주므로 망설이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하면 혼자 먹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첫날, 둘째 날까지는 애들이 먼저 다가와 관심을 보이지만 계속 그럴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다음부터는 자기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렸다. 합창부, 댄스부, 밴드부 등은 분위기상 친구 사귀기에 좋아서
그런 반을 한두 개 정도 가입하면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합창시간과 의학 용어 반이었다.
수업이 재미있다기보다는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합창부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유시간에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었다.
피아노 주위에서 몇 명이 놀고 있길래 좋은 기회다 싶어 내가 피아노 연주해줄까? 하고 곡 앞부분만 짧게 쳤는데
무관심했던 아이들과 합창부 선생님까지 오셔서 관심을 보였다.
나랑 친구 하자. 너 엄청나다. 라고 과찬까지 해주었고
그걸 계기로 지금의 미국 단짝친구는 물론 합창콘서트 때 반주를 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내가 피아노를 칠까 말까 라고 망설이기만 했더라면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천만의 말씀 ~ 만만의 콩 떡
10개월간의 교환학생 기간에 영어를 얼마나 할 수 있을 지 많은 학생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10개월 기간 동안에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자신이 이미 학습된 영어 수준의 차이와 개인 간 언어습득의 차이도 있겠지만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듣기와 말하기 영역에서는 많이 향상되겠지만 쓰기와 문법 면에서는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보완하고자 했을 때
완벽한 언어를 할 수 있게 되며 한국으로 돌아와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라면 수능영어공부를 따로 해야 한다.
하지만 10개월간의 교환학생 기간에 영어를 완벽하게 할 수 없을지라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미국
문화에 대한 큰 경험,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교류했던 인간관계 등은 무엇보다 값진 재산이 된다.
경험은 나의 자산이며 그것은 나를 더욱더 빛나게 할 것이다.
뮤지컬 공연의 중심지 뉴욕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 중에 유료 여행이 있었다. 뉴욕과 LA 중 정말 가보고 싶었던 뉴욕으로 정했다.
그곳에서 다른 한국인 교환학생들도 만나고 여태껏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6일의 여행 기간 동안 거의 매일같이 비가 부슬부슬 오고 추웠지만 우린 우산도 쓰지 않고
열심히 거리를 구경하며 걸어 다녔다. 특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내려다본 뉴욕의 전경과
저녁에 간 타임스퀘어의 불빛들은 잊을 수가 없다.
맨해튼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큰길인 브로드웨이는 세계 최고의 뮤지컬공연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내가 본 오페라의 유령도 정말 환상이었다. 6일이 너무나 짧게 느껴질 만큼 유익하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나중에 꼭 다시 가고 싶다. 이때 새삼 느낀 것은 영어를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마인드”라는 것이다.
끝이 아닌 또 하나의 시작
드디어 처음엔 멀게만 느껴졌던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왔다. 초반엔 힘들고 외로워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수십 번 들었지만, 그때 그만두지 않았던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을 별일없이 지낸 나 스스로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귀국하기 2주 전부터는 학교에서 성적증명서, 재학증명서도 발급받고 선생님들께 추천서도 몇 부 받아둬야 해서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성적증명서와 재학증명서는 카운슬러에게 부탁하면 되고 추천서는 자기가 들었던 과목 중 필요하고
열심히 참여했던 반 선생님께 여쭈면 대부분 흔쾌히 해주신다.
마지막 날엔 친구들이 선물도 주고 깜짝파티도 해주었다. 1년동안 내가 타고 다닌 스쿨버스, 학교,
정 많이 든 친구들, 선생님과 헤어진다는 게 그 전까진 실감 나지 않았는데 마지막 날
작별 선물까지 받으니까 마음으로 느껴졌다. 특히 매일 보던 단짝친구와는 정말 헤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마치고 호스트 가족, 룸메이트와도 인사를 하고 1년 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미국에서 보낸 나의 경험들은 앞으로 내게 닥칠 어려움이나 도전의 순간에도 적극적인 정신력을 심어 줄 것이다.
교환학생 생활은 마무리를 지었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뜨거운 열정과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